형태를 거부하는 시대의 조각, 혹은 형태의 추억:
조각가 박태동의 <젬스톤> 작업
형태가 조각의 모든 것이던 시대가 있었다. 우리가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현대’라고 부르는 시대, 그 중에서도 현대 미술을 이끌어간 주류, 모더니즘 미학의 전통에서 특히 그랬다. 이때 형태란 ‘순수한’ 형태, ‘아름다운’ 형태로서, ‘작가가 독창적으로 표현 혹은 구성’한 형태를 의미한다.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각에서도 현대로의 전환은 고전주의 미학의 거부가 출발점이다. 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대상(주로 인간, 그러나 성인이나 영웅 같은 위인, 그리고 그와 연관된 기적적 혹은 역사적 사건)을 그 외양에 충실하게 그러나 멋지게 그려내는 일, 한마디로 세계의 이상적 재현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말은 간단한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전복이다. 재현의 거부란 가까이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멀리는 서양 미술의 역사 대부분을 지배해온 미술의 임무 혹은 관습을 마다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술이 ‘현대’로 진입한다는 신호탄이다. 이런 신호탄으로, 회화에 마네가 있다면 조각에는 로댕이 있다. 현대 조각의 포문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발자크>(1898 제작/1939 설치) 상과 함께 열렸다. <발자크>는 고전주의 재현 어법의 준수와 이탈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로댕이 공공조각에서 처음으로 고전주의를 거부하고 제작한 낭만주의 충만한 동상이다.
그런데 조각이 재현을 거부한다면 무엇을 할까? 지금까지 해오던, 저 바깥의 세계를 멋지게 보여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깨졌을 때 드러난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회화에서는 화판과 물감, 조각에서는 돌과 흙덩어리. 이른바 물질적 매체의 세계, 그동안 아름다운 거울을 만드는 수단으로만 쓰여 전혀 주목의 초점이 아니었던 세계다. 그러나 아무리 미답의 영역이라 한들, 물질적 매체, 즉 재료가 곧 예술이 될 수는 없으니, 단순한 물질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가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의미 있는 형태significant form”(클라이브 벨, 1914)다. 그런데 한낱 물질을 예술로 탈바꿈시키는 이런 중차대한 형태는 어디서 나올까? 재현을 거부했으므로 세계에서 올 수는 없다. 형태의 기원은 이제 단 한 곳, 미술가의 정신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모더니즘 조각의 역사는 마티스, 피카소, 브랑쿠시, 헨리 무어, 토니 스미스, 안소니 카로 등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창조적 정신들의 노력, 점점 더 순수하고 점점 더 독창적인 형태를 찾으려는 구성composition의 노력들로 점철된 이어달리기가 되었다.
자연의 풍경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처럼, 풍경(혹은 그 무엇이든 미술 바깥의 어떤 것)을 묘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회화 혹은 조각!(클레멘트 그린버그, 1939) 이것이 모더니즘 미술의 포부였다. 오직 순수한 형태로 자연에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급이 되겠다는 것이니, 지금 봐도 참 대단한 기상이다. 바로 이 기상이 모더니즘을 현대 미술의 견인차로 이끌어간 힘이다. 회화에서는 근 한 세기, 조각에서는 약 반 세기 동안. 그랬는데 이렇게 영웅적이던 형태가 끝나는 날이 왔다. 여기에도 물론 신호탄이 있다. 1959년 프랭크 스텔라가 그린 검정 회화들과 1965년 도널드 저드가 제시한 「특수한 대상Specific Object」이 그것이다.
스텔라가 오직 캔버스의 물리적 구조에서만 연역한 형태로 회화를 제작함으로써 이제껏 순수한 형태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주장되어 온 작가의 구성이 한갓 주관적/관념적 산물에 불과함을 폭로했다면, 저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람자의 공간으로 진출하는 ‘특수한 대상’을 만들어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인 범주 자체를 폐기해버렸다. 이후는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냥 ‘미술’ 혹은 ‘아트’의 시대다. 그리고 이 속에서 조각은 과정으로 대체되거나(프로세스 아트), 파편으로 흩어지거나(설치 미술), 혹은 공간으로 확장되거나(장소특정적 미술, 대지미술) 했지만, 이 모든 다양한 양상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대상(이동 가능한, 판매 가능한)의 쇠퇴, 형태(주관적, 구성적, 독창적, 심미적, 영속적)의 파괴다.
그럼 이런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형태는 미술에서 사라졌을까? 정말 잠시 언어가 형태를 대체한 아주 급진적인 시기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내 형태는 돌아왔는데, 회화와 더불어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투톱으로 달려왔던 조각은 독립 범주로서의 지위를 잃은 다음에도 여전히 중요한 ‘조형’의 매체고, 조형에서 핵심은 형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다시 돌아온 형태는 전과 다른 형태다. 동시대 미술의 조각 작업에는 크게 세 종류의 형태가 있는 것 같다. 1) 싸구려 상품을 값비싼 작품으로 둔갑시켜 소비의 스펙터클을 강화하는 물신의 형태(베르사유 궁전에 설치(2008)된 제프 쿤스의 <풍선 개(마젠타)>, 1994-2000), 2) 소비의 스펙터클이 은폐하는 실재의 상실과 외상을 폭로하는 퇴행과 혐오의 형태(안팎이 뒤집혀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키키 스미스의 신체 형태, 더러운 봉제인형이 흉하게 엉겨 붙은 마이크 켈리의 룸펜 형태, 모두 주로 1990년대), 3) 포스트모더니즘의 반형태를 더 발전시켜 조각을 더 해체하는 탈기념비적인 형태(무차별적인 오브제를 무작위적인 조합으로 거의 무한히 늘어놓는 작업, 가령, 이자 겐즈켄의 <제국/흡혈귀: 누가 죽음을 죽이는가>, 2006). 양상은 다르지만, 이 모든 형태는 독특한 형태가 아니라 진부한 형태이거나,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훼손된 형태이거나, 구성된 형태가 아니라 집적된 형태라는 점에서, 한마디로 ‘물신 형태’(1)거나 ‘대항 형태’(2)거나 아니면 ‘반형태’(3)라 할 만하다. 이런 식의 형태들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동시대의 미술 현장을 목격하노라면 가히 오늘날은 형태를 거부하는 미술의 시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조각에서도 현대로의 전환은 고전주의 미학의 거부가 출발점이다. 이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대상(주로 인간, 그러나 성인이나 영웅 같은 위인, 그리고 그와 연관된 기적적 혹은 역사적 사건)을 그 외양에 충실하게 그러나 멋지게 그려내는 일, 한마디로 세계의 이상적 재현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말은 간단한 것 같지만 실은 엄청난 전복이다. 재현의 거부란 가까이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 멀리는 서양 미술의 역사 대부분을 지배해온 미술의 임무 혹은 관습을 마다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미술이 ‘현대’로 진입한다는 신호탄이다. 이런 신호탄으로, 회화에 마네가 있다면 조각에는 로댕이 있다. 현대 조각의 포문은 오귀스트 로댕(1840-1917)의 <발자크>(1898 제작/1939 설치) 상과 함께 열렸다. <발자크>는 고전주의 재현 어법의 준수와 이탈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로댕이 공공조각에서 처음으로 고전주의를 거부하고 제작한 낭만주의 충만한 동상이다.
그런데 조각이 재현을 거부한다면 무엇을 할까? 지금까지 해오던, 저 바깥의 세계를 멋지게 보여주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면? 세상을 비추는 거울이 깨졌을 때 드러난 새로운 세계가 있었다. 회화에서는 화판과 물감, 조각에서는 돌과 흙덩어리. 이른바 물질적 매체의 세계, 그동안 아름다운 거울을 만드는 수단으로만 쓰여 전혀 주목의 초점이 아니었던 세계다. 그러나 아무리 미답의 영역이라 한들, 물질적 매체, 즉 재료가 곧 예술이 될 수는 없으니, 단순한 물질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하는 요소가 필요했다. 이것이 바로 “의미 있는 형태significant form”(클라이브 벨, 1914)다. 그런데 한낱 물질을 예술로 탈바꿈시키는 이런 중차대한 형태는 어디서 나올까? 재현을 거부했으므로 세계에서 올 수는 없다. 형태의 기원은 이제 단 한 곳, 미술가의 정신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리하여, 모더니즘 조각의 역사는 마티스, 피카소, 브랑쿠시, 헨리 무어, 토니 스미스, 안소니 카로 등으로 이어지는 빛나는 창조적 정신들의 노력, 점점 더 순수하고 점점 더 독창적인 형태를 찾으려는 구성composition의 노력들로 점철된 이어달리기가 되었다.
자연의 풍경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처럼, 풍경(혹은 그 무엇이든 미술 바깥의 어떤 것)을 묘사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회화 혹은 조각!(클레멘트 그린버그, 1939) 이것이 모더니즘 미술의 포부였다. 오직 순수한 형태로 자연에의 종속에서 벗어나 자연과 동급이 되겠다는 것이니, 지금 봐도 참 대단한 기상이다. 바로 이 기상이 모더니즘을 현대 미술의 견인차로 이끌어간 힘이다. 회화에서는 근 한 세기, 조각에서는 약 반 세기 동안. 그랬는데 이렇게 영웅적이던 형태가 끝나는 날이 왔다. 여기에도 물론 신호탄이 있다. 1959년 프랭크 스텔라가 그린 검정 회화들과 1965년 도널드 저드가 제시한 「특수한 대상Specific Object」이 그것이다.
스텔라가 오직 캔버스의 물리적 구조에서만 연역한 형태로 회화를 제작함으로써 이제껏 순수한 형태의 유일한 기원이라고 주장되어 온 작가의 구성이 한갓 주관적/관념적 산물에 불과함을 폭로했다면, 저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관람자의 공간으로 진출하는 ‘특수한 대상’을 만들어 회화와 조각이라는 전통적인 범주 자체를 폐기해버렸다. 이후는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그냥 ‘미술’ 혹은 ‘아트’의 시대다. 그리고 이 속에서 조각은 과정으로 대체되거나(프로세스 아트), 파편으로 흩어지거나(설치 미술), 혹은 공간으로 확장되거나(장소특정적 미술, 대지미술) 했지만, 이 모든 다양한 양상의 공통점을 꼽는다면 대상(이동 가능한, 판매 가능한)의 쇠퇴, 형태(주관적, 구성적, 독창적, 심미적, 영속적)의 파괴다.
그럼 이런 포스트모더니즘과 더불어 형태는 미술에서 사라졌을까? 정말 잠시 언어가 형태를 대체한 아주 급진적인 시기도 있긴 했다. 그러나 이내 형태는 돌아왔는데, 회화와 더불어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가장 유구한 투톱으로 달려왔던 조각은 독립 범주로서의 지위를 잃은 다음에도 여전히 중요한 ‘조형’의 매체고, 조형에서 핵심은 형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서 다시 돌아온 형태는 전과 다른 형태다. 동시대 미술의 조각 작업에는 크게 세 종류의 형태가 있는 것 같다. 1) 싸구려 상품을 값비싼 작품으로 둔갑시켜 소비의 스펙터클을 강화하는 물신의 형태(베르사유 궁전에 설치(2008)된 제프 쿤스의 <풍선 개(마젠타)>, 1994-2000), 2) 소비의 스펙터클이 은폐하는 실재의 상실과 외상을 폭로하는 퇴행과 혐오의 형태(안팎이 뒤집혀 내장이 다 쏟아져 나온 키키 스미스의 신체 형태, 더러운 봉제인형이 흉하게 엉겨 붙은 마이크 켈리의 룸펜 형태, 모두 주로 1990년대), 3) 포스트모더니즘의 반형태를 더 발전시켜 조각을 더 해체하는 탈기념비적인 형태(무차별적인 오브제를 무작위적인 조합으로 거의 무한히 늘어놓는 작업, 가령, 이자 겐즈켄의 <제국/흡혈귀: 누가 죽음을 죽이는가>, 2006). 양상은 다르지만, 이 모든 형태는 독특한 형태가 아니라 진부한 형태이거나, 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훼손된 형태이거나, 구성된 형태가 아니라 집적된 형태라는 점에서, 한마디로 ‘물신 형태’(1)거나 ‘대항 형태’(2)거나 아니면 ‘반형태’(3)라 할 만하다. 이런 식의 형태들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동시대의 미술 현장을 목격하노라면 가히 오늘날은 형태를 거부하는 미술의 시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
이런 오늘날의 상황에서 형태를 만드는 조각가가 있다! 그것도 이제는 전통이 되어버린 모더니즘의 방식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작품 활동을 했으니, 작업 경력 30년에 이르는 중견 작가 박태동(1961년 생)이 바로 그 조각가다. 이 글은 형태를 거부하는 시대에 형태를 추구하는 박태동의 조각을 살펴본다. 이는 물신 형태와 대항 형태와 반형태가 난무하는 오늘날 조각의 현장에서 형태가 설 자리는 있는지, 있다면 그 자리는 어디인지를 고민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박태동은 자신의 조각을 그가 2010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최근작 <젬스톤Gemstones>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수긍이 가는 구분이다. <젬스톤>은 이 연작의 명칭이 가리키듯이, 자연에서 유래한 듯한 보석의 원석 모양의 대상들이다. 재료는 주로 메탈이다. 크기와 색채와 모양이 다 다르지만 닫힌 다각형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이 <젬스톤>들은 하나씩 따로 흩어져 있기도 하고, 또 여럿이 함께 엉겨 자기보다 큰 다른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그림 1).
박태동은 자신의 조각을 그가 2010년부터 발표하기 시작한 최근작 <젬스톤Gemstones> 이전과 이후로 나눈다. 수긍이 가는 구분이다. <젬스톤>은 이 연작의 명칭이 가리키듯이, 자연에서 유래한 듯한 보석의 원석 모양의 대상들이다. 재료는 주로 메탈이다. 크기와 색채와 모양이 다 다르지만 닫힌 다각형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은 이 <젬스톤>들은 하나씩 따로 흩어져 있기도 하고, 또 여럿이 함께 엉겨 자기보다 큰 다른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그림 1).
반면에 <젬스톤Gemstones> 이전 작업은 나무, 돌, 금속 등 상이한 여러 재료와 방식이 쓰였고, 뿐만 아니라 닫힌 형태와 열린 형태가 함께 나온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두 형태는 <명상Meditation> 연작(1993)에서처럼 마치 대화하듯이 마주 보며 따로 있는가 하면(그림 2), <상자가 된 나무A Tree Became Box> 연작(1995)과 <오후의 생각Things Thinking in Afternoon>(1998) 연작에서처럼 닫혀 있는 형태를 열어 내는 방식으로 하나의 형태 속에 함께 있기도 한다(그림 3, 4).
닫힌 형태와 열린 형태, 이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는 작품들에서 형태 개방의 시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명상 3>에서 무슨 태초의 물건인 양 불뚝 솟아나 있는 수직 입방체를 향해 은근한 춤사위처럼 뻗어나간 선적 구성물은 완강하게 닫힌 형태를 희롱하는 듯한 열린 형태로 생동한다. 석고로 직조하여 청동으로 뜬 이 선 구성물은 금방이라도 잭의 콩나무처럼 훌쩍 자라 맞은 편 닫힌 입방체의 지붕을 두드릴 것 같다. 열어보라고. 형태 개방의 시도는 때로 <상자가 된 나무 2>에서처럼 형태의 파괴에 근접하기도 한다. 어느 산에 서 있다가 공장으로 들어가 목재가 된 나무, 자재로 쓰이기 위하여 상자 모양으로 가공된 네모반듯한 형태가 귀퉁이들에서 불규칙하게 열려 있다. 기하학적 형태 안에 갇힌 자연의 속살을 드러내고, 그렇게 속을 조금씩 드러낸 상자들을 서로 잇대어 다른 형태를 만들어낸 애틋한 작업이다. 그런가 하면 <오후의 생각 3>은 가장 연역적인 방식으로 사각의 닫힌 철판을 열어 본 흥미로운 작품이다. 직사각형 철판이 계단식으로 속을 쏟아내고 있다. 가장 안쪽의 직사각형을 기준으로 삼아 철판을 네 개의 닮은 꼴 직사각형으로 구획하고, 안쪽 세 사각형의 세 면을 오려 아래쪽 바깥으로 쏟아지게 한 것이다. 형태를 개방하는 연역의 논리가 엄밀하지는 않다. 예컨대, 가장 안쪽의 가장 작은 직사각형은 상단과 좌우단이 열리는 그 위의 두 사각형과 달리 상하단과 좌단이 열리며, 마치 늘어진 넥타이나 풀어진 옷고름처럼 조형된 형태 역시 연역의 논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세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점은, <젬스톤> 이전 작업에서 작가는 닫힌 형태보다 열린 형태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관심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다. 조각에서 열린 형태라는 것이 가능해진 일 자체가 현대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각의 전통적인 방법은 빼기 아니면 더하기, 즉 조각 아니면 소조다. 이 가운데 어떤 방법을 쓰던 전통 조각은 닫힌 형태일 수밖에 없는데, 이 폐쇄적이고 완결된 덩어리를 열어낼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용접이라는 현대 조각의 방법인 것이다. 1910년대 중반 피카소의 구성 조각(가령, <기타>)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 말 훌리오 곤살레스에 의해 완성된 용접 조각은 ‘공간 속의 드로잉’이라는 열린 형태의 지평을 조각에 열어주었다.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새로운 재료들도 등장했다. 청동을 제외한다면 철, 스테인레스, 알루미늄 등의 메탈은 그 자체가 용접과 함께 조각에 도입된 현대적인 재료다. <젬스톤>에서 작가는 바로 이 메탈과 용접을 주로 사용한다. 이전과 달리 재료와 방법에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진 모습이다. 그런데 형태에 대한 관심이 달라졌다. 열린 형태가 아니라 닫힌 형태로. 젬스톤은 저마다 특이하게 각진 아주 다양한 모습이지만 모두 완전히 닫힌 형태다.
젬스톤의 기본 단위 혹은 개개의 젬스톤을 작가는 ‘젬스톤 시드Gemstone Seed’라고 한다. 원석의 씨앗? 언젠가 보석이 될 수도 있는? 풍요롭고 귀한 자연의 생장 과정을 연상시키는 표현이지만, 알다시피 보석은 자연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수정처럼 예외적으로 스스로 자라는 원석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귀하기로는 정교하게 가공된 보석을 따라잡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박태동의 젬스톤도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젬스톤이 보석과 똑같은 것도 아니다. 대개 젬스톤은 돌이 아니라 메탈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나아가 보석은 두툼한 원석을 깎아내며 만드는 데 반해, 박태동의 젬스톤은 얇은 메탈 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든다는 점에서도 다르다(가끔 젬스톤이 돌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불규칙 다각형인 젬스톤의 조형원리는 정확한 대칭을 요구하는 보석의 커팅원리와 다르다). 말하자면, 젬스톤은 명칭과 형태가 암시하는 자연 및 보석과는 달리 순전히 작가에 의해 구성된 독특한 형태들인 것이다.
젬스톤의 형태 구성 원리와 이 원리에 잠재된 형태의 다양성은 2010년 젬스톤이 ‘조각’ 작품으로 처음 선보일 때(《‘젬스톤’-드로잉과 조각‘Gemstone’-Drawings & Sculpture》, 서울, 종로갤러리, 2010) 함께 전시되었던 드로잉들을 통해 알 수 있다(그림 5). 구성의 단위는 어떤 다각형이다. 삼각 형태, 사각 형태, 오각 형태가 가장 많이 보이지만, 비단 이 세 형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각형 뿔의 개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다각형이 대부분 불규칙 형태라는 점이다. 단위들의 형태는 작가가 구상하는 젬스톤 시드의 최종 형태와 긴밀하게 조응하며 만들어진다. 아주 큰 소수의 다각형 조각들로 대범하게 구성된 형태도 있고, 아주 작은 다수의 다각형 조각들로 조밀하게 구성된 형태도 있다. 고대의 거석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도 있고, 두 손으로 감쌀 만한 아기자기한 크기도 있다.
젬스톤의 주요 재료는 메탈이라지만, 그 또한 다양하다. 알루미늄과 스틸, 각종 동류와 스테인리스를 주로 쓴다. 작가가 전작을 통틀어 가장 많이 쓴, 그만큼 매우 잘 알지만 아직도 더 알고 싶은 흥미로운 재료들이다. 재료들은 서로 다른 각각의 성질에 의하여 젬스톤의 형태와 크기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재료의 성질과 젬스톤의 형태 및 크기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성적인 작용을 중시하는데, 이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재료가 개입한다. 바로 색채다. 작가는 재료들이 낼 수 있는 색채를 여러 방법으로 실험하며, 때로는 메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을 젬스톤에 입혀 낸다(그림 6). 도료를 표면에 칠하기도 하고, 화공약품으로 표면을 부식시키기도 하고, 거울처럼 반들반들 표면을 다듬기도 하고, 표면에 스크래치를 내 난반사 속에 금속의 살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캔디 컬러 같은 도료를 입히든 재료에서 발색을 하든, 작가가 채색을 위해 독습하거나 전수받은 전문 도색 기술은 젬스톤의 색채를 때론 투명하고 매끈하게, 때론 둔탁하고 투박하게 자유자재로 끌어낸다. 어떤 색채를 어떻게 입힐까? 이 역시 작가의 직관이 결정한다. 요컨대, 젬스톤은 여러 종류의 다각형 메탈 조각들을 용접해서 이어붙인 후 각 이음새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색채 그리고/또는 광택을 입힌 여러 종류의 다각 형태다. 이 모든 형태들의 출처는 작가의 구상이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 이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들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똑같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2014년 작 <가족A Family>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형태와 크기, 색채의 젬스톤들은 각자의 한 모서리를 서로에게 내주며 어울려 있을 수 있다. 이때 젬스톤들은 각자의 불규칙한 형태 자체로 따로 또 같이 아름답게 빛난다. 그런데 ‘아름답게’라니! 이 아름답지 않은 시대에?
닫힌 형태와 열린 형태, 이 두 가지 형태가 공존하는 작품들에서 형태 개방의 시도를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명상 3>에서 무슨 태초의 물건인 양 불뚝 솟아나 있는 수직 입방체를 향해 은근한 춤사위처럼 뻗어나간 선적 구성물은 완강하게 닫힌 형태를 희롱하는 듯한 열린 형태로 생동한다. 석고로 직조하여 청동으로 뜬 이 선 구성물은 금방이라도 잭의 콩나무처럼 훌쩍 자라 맞은 편 닫힌 입방체의 지붕을 두드릴 것 같다. 열어보라고. 형태 개방의 시도는 때로 <상자가 된 나무 2>에서처럼 형태의 파괴에 근접하기도 한다. 어느 산에 서 있다가 공장으로 들어가 목재가 된 나무, 자재로 쓰이기 위하여 상자 모양으로 가공된 네모반듯한 형태가 귀퉁이들에서 불규칙하게 열려 있다. 기하학적 형태 안에 갇힌 자연의 속살을 드러내고, 그렇게 속을 조금씩 드러낸 상자들을 서로 잇대어 다른 형태를 만들어낸 애틋한 작업이다. 그런가 하면 <오후의 생각 3>은 가장 연역적인 방식으로 사각의 닫힌 철판을 열어 본 흥미로운 작품이다. 직사각형 철판이 계단식으로 속을 쏟아내고 있다. 가장 안쪽의 직사각형을 기준으로 삼아 철판을 네 개의 닮은 꼴 직사각형으로 구획하고, 안쪽 세 사각형의 세 면을 오려 아래쪽 바깥으로 쏟아지게 한 것이다. 형태를 개방하는 연역의 논리가 엄밀하지는 않다. 예컨대, 가장 안쪽의 가장 작은 직사각형은 상단과 좌우단이 열리는 그 위의 두 사각형과 달리 상하단과 좌단이 열리며, 마치 늘어진 넥타이나 풀어진 옷고름처럼 조형된 형태 역시 연역의 논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렇더라도 이 세 작품을 통해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점은, <젬스톤> 이전 작업에서 작가는 닫힌 형태보다 열린 형태에 훨씬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관심은 지극히 현대적인 것이다. 조각에서 열린 형태라는 것이 가능해진 일 자체가 현대에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각의 전통적인 방법은 빼기 아니면 더하기, 즉 조각 아니면 소조다. 이 가운데 어떤 방법을 쓰던 전통 조각은 닫힌 형태일 수밖에 없는데, 이 폐쇄적이고 완결된 덩어리를 열어낼 수 있게 한 것이 바로 용접이라는 현대 조각의 방법인 것이다. 1910년대 중반 피카소의 구성 조각(가령, <기타>)에서 시작되어 1920년대 말 훌리오 곤살레스에 의해 완성된 용접 조각은 ‘공간 속의 드로잉’이라는 열린 형태의 지평을 조각에 열어주었다. 새로운 기술과 더불어 새로운 재료들도 등장했다. 청동을 제외한다면 철, 스테인레스, 알루미늄 등의 메탈은 그 자체가 용접과 함께 조각에 도입된 현대적인 재료다. <젬스톤>에서 작가는 바로 이 메탈과 용접을 주로 사용한다. 이전과 달리 재료와 방법에서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진 모습이다. 그런데 형태에 대한 관심이 달라졌다. 열린 형태가 아니라 닫힌 형태로. 젬스톤은 저마다 특이하게 각진 아주 다양한 모습이지만 모두 완전히 닫힌 형태다.
젬스톤의 기본 단위 혹은 개개의 젬스톤을 작가는 ‘젬스톤 시드Gemstone Seed’라고 한다. 원석의 씨앗? 언젠가 보석이 될 수도 있는? 풍요롭고 귀한 자연의 생장 과정을 연상시키는 표현이지만, 알다시피 보석은 자연 속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다(수정처럼 예외적으로 스스로 자라는 원석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귀하기로는 정교하게 가공된 보석을 따라잡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박태동의 젬스톤도 자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젬스톤이 보석과 똑같은 것도 아니다. 대개 젬스톤은 돌이 아니라 메탈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나아가 보석은 두툼한 원석을 깎아내며 만드는 데 반해, 박태동의 젬스톤은 얇은 메탈 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든다는 점에서도 다르다(가끔 젬스톤이 돌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때에도 불규칙 다각형인 젬스톤의 조형원리는 정확한 대칭을 요구하는 보석의 커팅원리와 다르다). 말하자면, 젬스톤은 명칭과 형태가 암시하는 자연 및 보석과는 달리 순전히 작가에 의해 구성된 독특한 형태들인 것이다.
젬스톤의 형태 구성 원리와 이 원리에 잠재된 형태의 다양성은 2010년 젬스톤이 ‘조각’ 작품으로 처음 선보일 때(《‘젬스톤’-드로잉과 조각‘Gemstone’-Drawings & Sculpture》, 서울, 종로갤러리, 2010) 함께 전시되었던 드로잉들을 통해 알 수 있다(그림 5). 구성의 단위는 어떤 다각형이다. 삼각 형태, 사각 형태, 오각 형태가 가장 많이 보이지만, 비단 이 세 형태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각형 뿔의 개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다각형이 대부분 불규칙 형태라는 점이다. 단위들의 형태는 작가가 구상하는 젬스톤 시드의 최종 형태와 긴밀하게 조응하며 만들어진다. 아주 큰 소수의 다각형 조각들로 대범하게 구성된 형태도 있고, 아주 작은 다수의 다각형 조각들로 조밀하게 구성된 형태도 있다. 고대의 거석 같은 어마어마한 크기도 있고, 두 손으로 감쌀 만한 아기자기한 크기도 있다.
젬스톤의 주요 재료는 메탈이라지만, 그 또한 다양하다. 알루미늄과 스틸, 각종 동류와 스테인리스를 주로 쓴다. 작가가 전작을 통틀어 가장 많이 쓴, 그만큼 매우 잘 알지만 아직도 더 알고 싶은 흥미로운 재료들이다. 재료들은 서로 다른 각각의 성질에 의하여 젬스톤의 형태와 크기에 영향을 미친다. 작가는 재료의 성질과 젬스톤의 형태 및 크기 사이에서 일어나는 감성적인 작용을 중시하는데, 이때 또 한 가지 중요한 재료가 개입한다. 바로 색채다. 작가는 재료들이 낼 수 있는 색채를 여러 방법으로 실험하며, 때로는 메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다채로운 색깔을 젬스톤에 입혀 낸다(그림 6). 도료를 표면에 칠하기도 하고, 화공약품으로 표면을 부식시키기도 하고, 거울처럼 반들반들 표면을 다듬기도 하고, 표면에 스크래치를 내 난반사 속에 금속의 살색을 드러내기도 한다. 캔디 컬러 같은 도료를 입히든 재료에서 발색을 하든, 작가가 채색을 위해 독습하거나 전수받은 전문 도색 기술은 젬스톤의 색채를 때론 투명하고 매끈하게, 때론 둔탁하고 투박하게 자유자재로 끌어낸다. 어떤 색채를 어떻게 입힐까? 이 역시 작가의 직관이 결정한다. 요컨대, 젬스톤은 여러 종류의 다각형 메탈 조각들을 용접해서 이어붙인 후 각 이음새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색채 그리고/또는 광택을 입힌 여러 종류의 다각 형태다. 이 모든 형태들의 출처는 작가의 구상이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것이 이 형태들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형태들이 이질적이지 않다는 것 또한 똑같이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2014년 작 <가족A Family>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형태와 크기, 색채의 젬스톤들은 각자의 한 모서리를 서로에게 내주며 어울려 있을 수 있다. 이때 젬스톤들은 각자의 불규칙한 형태 자체로 따로 또 같이 아름답게 빛난다. 그런데 ‘아름답게’라니! 이 아름답지 않은 시대에?
•••••
“모든 것이 모든 시대에 다 가능한 것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하인리히 뵐플린, 1915). ‘예술가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창조자’라는 것이 현대의 신화지만, 실제 미술가의 작업은 그가 사는 시대의 역사적 구속을 받는다는 엄정한 사실(그래서 ‘시대를 너무 앞서 간 비운의 천재’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을 일깨우는 데 많이 쓰인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앞 계단에 주저앉아 방금 보고 나온 벨라스케스를 부러워했다는 스텔라의 한탄은 여기 딱 맞는 사례다. 17세기 바로크 시대 스페인의 거장처럼 그리고 싶었다지만, 1950년대 말 후기 모더니즘 시대의 끝자락에 살았던 스텔라는 캔버스의 나무틀에서 연역한 똑같은 넓이의 검은 띠로, 역시 캔버스의 형태에서 연역한 십자형 내지 장방형을 그리는, 암담할 정도로 무미건조한 회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텔라의 검정 띠 그림은 또한 구체적인 차원에서 역사가 미술가의 작업에 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미술가의 작업은 그가 사는 역사적 시대 일반의 규정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전문 분야, 즉 미술의 역사를 참조해서 이루어진다(이렇게 해야 어떻게든 작품에 의미 부여가 가능하고, 이 일이 안 되면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알아줄 수가 없다). 미술사의 참조는 현존하는 질서를 기준으로 순방향과 역방향, 두 방향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는 ‘계승’, 후자는 ‘전복’이라고 흔히 담론화된다. 이때 계승은 현존 질서의 심화나 확장을, 전복은 그 질서에 대한 대항과 단절을 의미한다. 성공적일 경우, 전복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 관점, 지평을 열 수 있다. 스텔라의 검정 회화 작업은 전복의 대표적인 사례다.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당대의 지배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으므로.
현대 이후 서양 미술의 역사는 계승과 전복의 파도들로 가득하지만, 2차대전 이후 미술의 전복은 대체로 격세유전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 특징이다. 1920년대의 구축주의와 다다가 전성기 모더니즘을 전복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들(예컨대, 모노크롬과 구축물, 포토몽타주와 아상블라주)이 당대의 실패를 딛고 한 세대를 건너 뛴 후,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과 팝에서 재출현하여 후기 모더니즘의 전복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예다(이 점에서 전복 역시 일종의 계승, 격세유전적 계승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전복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작가-구성-형태의 트리오다. 그런데 이 트리오는 왜 전복되어야 했으며, 전복의 결과는 무엇인가?
전복의 이유는 순수주의 미학의 실패다. 이 미학이 당초 약속했던 순수 예술의 세계는 인간이 도구화, 파편화되지 않는 세계, 이 점에서 분업의 원리로 작동하는 현대 산업사회와 대립(이 대립 때문에 현대 미술이 재현을 거부한 것이다)하는 세계다. 그리고 오랫동안 예술가는 이 약속을 지키는, 현대인의 대표선수 역할을 해왔다. 분업체계 속에 사는 현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착상-제작-완성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예술가는 분열되지 않은, 완전한, 자유로운 인간의 정신을 대변했던 것이다(프리드리히 실러, 1793-95).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사실은 예술가도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현대에 예술가는 후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시장에 의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라고 해서 열외로 보호하지 않는 자본주의 시장 체계 속에서 예술작품의 근본 역설은 자본주의 산업에 반하는 특성(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닌, 희귀하고 유일무이한 수제품)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이 반기는 특수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역설로 인해 순수 예술은 당초 대립을 표방했던 현대 산업사회의 일부로 편입(예술의 제도화)되었고, 예술작품은 더 나은 세계를 꿈꾸게 하는 “행복의 약속la promesse du bonheur”(스탕달, 1822)이 아니라 특수 시장에서 은밀하게 유통되는 고가의 상품(예술이라는 물신)이 되었다. 약속의 실패를 예술의 신화로 은폐하는 세계의 전복은 역사의 진전이다. 결국 전복이란 신화의 가면을 벗겨내는 일이었고, 이런 전복의 결과가 작가의 죽음-구성의 포기-형태의 해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전복은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더 필요하다. 예술과 문화산업의 상호침투가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시대이므로. 따라서 백금으로 주조한 후 다이아몬드를 잔뜩 박은 해골바가지에 맞서는 대항 형태, 그리고 현실을 분식하는 아름다운 가상의 스펙터클에 맞서는 반형태는 동시대 미술의 전략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전략들의 공통 문제는 딱 한 가지, 아름다움의 자가 박탈이다. 그래서 오늘날 아름다움은 산업화한 동시대 미술과 예술화한 문화산업 양자의 최종병기가 되어, 시선을 홀리는 미혹의 물신을 양산하는 데에만 남용되고 있다.
현실의 불규칙과 부조화를 화려한 미모의 물신으로 덮어 가리지 않고 그 자체로 아름답게 드러내는 작가와 구성과 형태는 정녕 불가능할 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는 아름다움의 남용에 맞서 아름다움을 자가 박탈한 동시대 미술의 시각적 그리고/또는 미적 곤경에 한 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지만 절박하게 요구되는 출구다. 박태동의 <젬스톤> 작업은 동시대 미술의 현장에서 이런 출구를 찾고자 하는 드문 노력처럼 보인다.
스텔라의 검정 띠 그림은 또한 구체적인 차원에서 역사가 미술가의 작업에 작용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미술가의 작업은 그가 사는 역사적 시대 일반의 규정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전문 분야, 즉 미술의 역사를 참조해서 이루어진다(이렇게 해야 어떻게든 작품에 의미 부여가 가능하고, 이 일이 안 되면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알아줄 수가 없다). 미술사의 참조는 현존하는 질서를 기준으로 순방향과 역방향, 두 방향이 모두 가능한데, 전자는 ‘계승’, 후자는 ‘전복’이라고 흔히 담론화된다. 이때 계승은 현존 질서의 심화나 확장을, 전복은 그 질서에 대한 대항과 단절을 의미한다. 성공적일 경우, 전복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질서, 관점, 지평을 열 수 있다. 스텔라의 검정 회화 작업은 전복의 대표적인 사례다. 후기 모더니즘이라는 당대의 지배 질서를 무너뜨리는 도화선이 되었으므로.
현대 이후 서양 미술의 역사는 계승과 전복의 파도들로 가득하지만, 2차대전 이후 미술의 전복은 대체로 격세유전적 성격을 띤다는 것이 특징이다. 1920년대의 구축주의와 다다가 전성기 모더니즘을 전복하기 위해 개발한 장치들(예컨대, 모노크롬과 구축물, 포토몽타주와 아상블라주)이 당대의 실패를 딛고 한 세대를 건너 뛴 후,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과 팝에서 재출현하여 후기 모더니즘의 전복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가장 큰 예다(이 점에서 전복 역시 일종의 계승, 격세유전적 계승이라 할 수 있다). 그때 전복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작가-구성-형태의 트리오다. 그런데 이 트리오는 왜 전복되어야 했으며, 전복의 결과는 무엇인가?
전복의 이유는 순수주의 미학의 실패다. 이 미학이 당초 약속했던 순수 예술의 세계는 인간이 도구화, 파편화되지 않는 세계, 이 점에서 분업의 원리로 작동하는 현대 산업사회와 대립(이 대립 때문에 현대 미술이 재현을 거부한 것이다)하는 세계다. 그리고 오랫동안 예술가는 이 약속을 지키는, 현대인의 대표선수 역할을 해왔다. 분업체계 속에 사는 현대의 일반인들과는 달리 착상-제작-완성의 전 과정을 지배하는 예술가는 분열되지 않은, 완전한, 자유로운 인간의 정신을 대변했던 것이다(프리드리히 실러, 1793-95). 그러나 겉보기와 달리 사실은 예술가도 이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현대에 예술가는 후원을 받는 자가 아니라 시장에 의존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예술가라고 해서 열외로 보호하지 않는 자본주의 시장 체계 속에서 예술작품의 근본 역설은 자본주의 산업에 반하는 특성(공장에서 찍어낸 것이 아닌, 희귀하고 유일무이한 수제품)을 통해 자본주의 시장이 반기는 특수 상품이 된다는 것이다. 이 역설로 인해 순수 예술은 당초 대립을 표방했던 현대 산업사회의 일부로 편입(예술의 제도화)되었고, 예술작품은 더 나은 세계를 꿈꾸게 하는 “행복의 약속la promesse du bonheur”(스탕달, 1822)이 아니라 특수 시장에서 은밀하게 유통되는 고가의 상품(예술이라는 물신)이 되었다. 약속의 실패를 예술의 신화로 은폐하는 세계의 전복은 역사의 진전이다. 결국 전복이란 신화의 가면을 벗겨내는 일이었고, 이런 전복의 결과가 작가의 죽음-구성의 포기-형태의 해체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전복은 여전히 유효하고 어쩌면 더 필요하다. 예술과 문화산업의 상호침투가 어느 때보다 더 강력한 신화를 만들어내고 있는 시대이므로. 따라서 백금으로 주조한 후 다이아몬드를 잔뜩 박은 해골바가지에 맞서는 대항 형태, 그리고 현실을 분식하는 아름다운 가상의 스펙터클에 맞서는 반형태는 동시대 미술의 전략으로서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전략들의 공통 문제는 딱 한 가지, 아름다움의 자가 박탈이다. 그래서 오늘날 아름다움은 산업화한 동시대 미술과 예술화한 문화산업 양자의 최종병기가 되어, 시선을 홀리는 미혹의 물신을 양산하는 데에만 남용되고 있다.
현실의 불규칙과 부조화를 화려한 미모의 물신으로 덮어 가리지 않고 그 자체로 아름답게 드러내는 작가와 구성과 형태는 정녕 불가능할 것인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는 아름다움의 남용에 맞서 아름다움을 자가 박탈한 동시대 미술의 시각적 그리고/또는 미적 곤경에 한 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은 희박한 것 같지만 절박하게 요구되는 출구다. 박태동의 <젬스톤> 작업은 동시대 미술의 현장에서 이런 출구를 찾고자 하는 드문 노력처럼 보인다.
2015, 8, 6, 조주연(미학+미술이론)
참고문헌
프리드리히 실러,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1793-95
스탕달, [연애론], 1822
클라이브 벨, [의미 있는 형태], 1914
하인리히 뵐플린, [미술사의 기초 개념], 1915
클레멘트 그린버그, [아방가르드와 키치], 1939
스탕달, [연애론], 1822
클라이브 벨, [의미 있는 형태], 1914
하인리히 뵐플린, [미술사의 기초 개념], 1915
클레멘트 그린버그, [아방가르드와 키치], 1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