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술을 만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막연함으로 시작한 여정이었다.


1.
혼(魂)과 열정, 사명감 등의 절절함이 회청색조의 실존문학에서 느껴지는 허탈함과 버무려진 것이 예술의 실체일 것이라고 예상하며 또 매료되었다.
우울함은 그 자체의 독특한 매력이 있었으며, 그림을 잘 그리는 17세 소년은 한겨울의 도시 구석진 곳의 표정에서 그것을 꺼집어내곤 했다.
미래를 그려, 명확하고 진취적인 꿈을 꾸는 것이 학생, 청소년의 덕목이라 강조하던 시절에, 뜬구름 뒤에 있긴 있을거다 라는 막연함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예술을 시작했다.
뜬구름 뒤의 것은 보이지도 않았고,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물어본들 답을 얻을 수 도 없어 오히려 그러함에 더 짜릿한 기대와 흥분을 담고 살 수 있었다.
1970년대의 서울, 한국에서 예술은 17세 소년에게 그 정도의 정보를 주었고 그 만으로도 행복했다.
대학은 합격, 혹은 가고자 했던 곳에 도착했다는 큰 기쁨을 잠시 주었으나...이내 설명하기 힘든 실망감. 그것은 그 소년이 막연함을 맹목으로 믿어버린 애매한 기대에서 비롯한 결과일 것이다.
대학에 가면.. 구름 뒤의 비밀을 알고 있는 많은 이들이 동화처럼 친절하게 기다리고 알려주고, 예술과 함께 노닐 것이라는 예상을 했던 것은 매우 큰 오해였다.
심지어 병영을 방불케하는 질서와 상명하복이 가득한 분위기의 학교생활은 ‘이것은 잘못되었다’라는 결론을 쉽게 내준다.
방황(?)은 2년여 였지만 그때론 절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 허송과 비슷한 3년간의 시간을 보내고...
군대를 가야하는 일은 어쩌면 다행이었다. pause를 누르고 되돌이킬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니까.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 온 학교에서는 할 일이 있었다. 불만이라는 선명한 결론을 서둘러 내었던 나의 태도를 재점검 하게 된다. 마음을 다잡고 찬찬히 돌아보니, 주변에는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고, 훨씬 먼저 이와 같은 길을 걸었던 본받고 싶은 선배 예술가들이 있었고, 그들 또한 이러한 동화같지 않은 과정을 밟았는데, 이곳에서 스스로 해결한 것이 많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믿음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재미있었다.
우선 느즈막 복학을 하니 우습게 상전 노릇하는 어리석은 자 들을 볼일 없는 것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요즘처럼 쉽게 정보를 얻었으면 더 효율이 좋았겠지만, 나름 서점과, 도서관과 발품으로 원하는 것들을 찾아다니는 여정도 즐거웠고, 어리석게도 그 안에 해법이 없을 것이라 여겨 외면했던 몇 몇 수업에서 참 많은 것을 ‘배운 것’은 어쩌면 예술, 혹은 조각을 그만두지 않게 한 끈 이었다.
예술 공부를 함께한 친구들과 서로를 나누는 일에는 늘 술이 필요하다. 참 진지하기도하고, 고집들도 세고, 다음날이면 반의반도 기억 못할 것이면서 목이 터지게 주장들을하고....주장을 해대는 고집이 어쩌면 예술가의 개성이고 덕목인지도 모르겠으나 최소한 나에게는 단지 피곤한 단락이었다.
그때는 미처 생각의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 조심스레 짐작해 보건데, 스승님들은 과연 그 답을 알고 있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30년을 훌쩍 넘도록 ‘조각가’라는 타이틀을 유지하면서 살 것이라는 계획을 한 적은 없었다. 왜냐하면 어떤 계획을 꾸미기에는 예술 이라는 것이 너무 막연했고, 주변 비슷한 이들이 야멸차게 그것을 해내는 것을 보면 부럽긴 하지만 그들이 무슨 내일을 설계하고 있는지, 무슨 예술에 빠져있는지 또 어떤 말을 하는지도 잘 몰랐기 때문이다.

2.
나는 손놀림이 좋았고, 보이는 것을 모사하는 능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러한 점은 어느 정도 타고나야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 능력이 ‘미술을 잘 하는 것’으로 평가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한 능력이 미술의 진정한 가치에 작용하는 것은 미미하며, 때로는 없어도 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은 스승님들의 조언도 있었겠으나, 80년대부터 비교적 수월하게 접하게 되는 외국(주로 뉴욕에서 벌어지는 현대미술의 현상들)의 작가들이 구한 방법과 답변들인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으며, 국내의 청년작가들 끼리 여러 형태로 서로의 학습을 나누는 일이 많아졌다. 전시, 전시기획 등을 진행하면 아주 활기찬 토론과 앎의 나눔이 있어, 기존했던, 기존하지 않았던 미술에 대한 학습을 많이 할 수 있었다.
제법 부지런한 청년이었다.
손재주 좋은 것에 많이 힘들어했다. 무슨 재료를 주던 나의 손잽신으로 덮어져 그저 뻔한 결과를 봐 왔기 때문이다. 손재주와 더해진 감성으로 이루는 예술들을 무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섬세한 손재주의 쟈코모 만주(Giacomo Manzu), 투박하지만 에너지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부르델(Antoine Bourdelle), 존경해 마지않는 쟈코메티(Alberto Giacometti)는 소년시절을 떠나 지금까지도 매우 사랑하는 조각가이다. 그와 같은 예술가들이 이미 충분히 재미있고, 감동적인 결과들을 보여주었다. 때로는 경쾌하고, 묵직하고, 진지하게....
나는 심각한 내용을 작품에 전달하는 능력이 없다. 엄밀히 그리 심각한 사람이 아님과 동시에 나의 심각함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것은 마치 부끄러운 일기를 쓰는 것 같다는 생각에 시도조차 하지 않기에 더 그렇다.
물성의 탐구에 매료된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게서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손재주로 표현되는 구체화에 대한 염증은 곧바로 물질 스스로가 내재한 표정과 성향을 통한 전달이라는 개념적 추상에 매료되게 한 기폭제였다.
공교롭게 망연한 대학생활을 단절시킨 뒤 복학한 3학년 2학기인 80년대 중반부터 순 재료라 할 수 있는 물질 그 자체가 내는 소리를 지휘하는 일에 너무도 행복했다. 점토를 던지며 그것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야기들, 10센티미터 두께의 철강판을 휘거나, 자르거나, 부러뜨렸을 때 그 재료가 부르짖는 소리들이 있었다. 
족히 10년여는 그 일에 몰두 한 셈이었다.
그러다가 소통과 공감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사실에 힘들어진다. 처음부터 예상을 하긴 하였지만, 그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고, 이러한 표현을 공감하는 극소수의 인물들과 감정을 공유하는 것 만으로도 즐거웠었는데, 답답함의 연속은 모종의 전환점을 맞을 수 밖에 없게 된다.
내 자신이 갖고 있는 표현의 깊이는 서사적이라기보다는(당시에는 그래야만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수필정도의 무게였으며, 이조차 물성의 변이를 통한...즉 난독(難讀)의 표현으로 여럿과 공유하기 힘들다는 공허함...이 시기의 말미에 겪는 개인사적 문제들...

3.
젬스톤(gemstone)의 발견
“2000년대에 들어서, 예술작품의 소중함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이와 함께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 주는 의미에 천착하게 된다. 귀함의 의미는 화폐로 책정된 값어치 일 수 도 있고, 현상적이고 사회적 의미일 수 도 있다. 예술이 대중과 소통하는 일 중의 하나가 공공성이다. 공공미술(public art)는 너른 범위에서 해석된다. 
gemstone series의 작품을 시작한 것은 2009년도부터이다. 
우선 ‘상식적인 쉬운 방법’을 택하여 보석, 혹은 원석이란 의미와 형태를 불러오게 된다, 속이 꽉 채워져 있는 광물인 ‘원석’을 판재의 용접과 연마의 방법을 택하여 표현한다. 표면의 색채표현과 광택 등의 마감은, 속이 비워져있으나 견고해 보이는 예술 표현의 트릭이며, 이것은 회화의 표현방법인 일루젼의 제시와 흡사하다.
한편으로 장식적인 시각적 요소를 띄고 있는 이 작품들은 해석이 어렵고, 거리가 느껴지던 그동안의 추상 형태에 비해서 그나마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장점을 갖게 되어 몇 몇 곳의 공공장소에 ‘예술장식품’의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상시 관람이 가능한 모습으로 설치된다. gemstone garden, gemstone towers, growing gemstones 등 일련의 시리즈들 중 최근 발표하고자하는 gem icicles 연작은 이전 gemstone seeds의 작품들과 맥락을 함께한다. 여러개의 ‘원석’들이 풍경을 이루거나, 쌓여지거나, 혹은 불규칙적으로 조립되어 소중함을 표현했다면, 최근 icicle 연작의 경우는 그 소중함의 본질을 관통하려하는 의지가 보여 진다.”
- 2020년도 어느 전시를 위해 스스로 썼던 젬스톤에 대한 설명
어떤 이유가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주제를 먼저 챙겼다. 소중함, 귀중함에 대한 의미를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 할 것(그간 애써 우회하며 수줍어하던 표현의 반대에 해당되는 것)을 찾아보았고, 
그것은 가독성을 높아야겠다고 생각했으며(작품의 설명을 학습처럼 진행해야 해독이 가능한 것에서 지쳤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과 호흡하고 싶었다.
스케일이 주는 감동을 배제할 수 없기에 제작 규모의 확장성을 고려했다.
공공미술로 제공하고 싶었다. 
청년 때의 착각을 벗어나 작품 본연의 기능으로 조각가의 언어를 갖고 있지 않은 이들에게 쉽지만 상상할 수 있고, 관심을 갖게 된다면 더 깊은 이야기를 찾을 수 있는 정도의 예술적 서비스를 하고 싶었다. 거리나 공공장소에 필요이상으로 많은, 진정 혐오스러운 영혼 없는 조형물을 조금은 바꾸고 싶었고, 소극적 성격은 나서서 목소리를 내는 것 보다는, 어디가 되었든 나의 작품으로 이야기 해보고자 함이다.
이 당시의 작품구상, 내용과 그것을 전개하는 작가로써의 공력은 비교적 쉬운 과정이다. 제작은 지난하고, 때로는 내 자신도 납득 어려운 부분도 있을 만큼 실질적으로 힘이든 내용이 많은 편이었다. 일을 도와주는 전문가들이 있어 진행 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그러면서 또 십 여년이 지난다.

4.
새로운 작업에 대하여
태도나 제작 방법 등 많은 면에 있어, 물성을 통한 표현을 했던 시기로 회귀 할 듯 싶다.
재료에 직접적인 자극과 그 반응을 통했던 일 말이다.
소통을 위한 젬스톤들은 여러 면에서 만족스러운 부분도 있었지만, 깊숙한 갈증을 해소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젬스톤을 제작하면서도 그 이전의 작품들을 간간히 했던 것처럼, 젬스톤을 아예 버리려는 것도 아니다. 
젬스톤을 발견(구체적 표현으로 정리하기)하고자 이전 작품행위를 멈추고 고민하던 시간은 2년 여였다. 감상자의 입장에 지나치게 친절하게 섰던 부분이 있었다. 그래야 했고 그렇게 하고 싶어서였다. 10년 넘게 애증이 가득했던 gemstone series를 살짝 접어 보려한다. 
내 스스로의 작품을 위한 시간을 만들고자한다. 이미 한 두해 전부터 마음을 추스르며 생각해본 것들이 머릿속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올해가 환갑이란다. 미소가 아니라 큰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살지 않았고, 인생은 ‘미술’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막연함은 있었지만, 지금은 선명하게, 나는 스스로 조각가라고 여기게 된다.
‘문학’과  ‘문학과 깊이 연관된 부분’에 동경과 꿈이 있었으며, 나의 미술은 그래야했고, 나름 그렇게 진행했다.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해보면서도 결국엔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예상은 했던 것 같다.
60년을 살고, 40여년을 미술공부를 했으며, 30여년을 외견상 조각가로 살았다.
잘 해봐야겠다.



2021년 2월   조각가 박 태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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